냉장고에 오징어 반 마리, 애호박 조각, 표고버섯 두 개, 새우 몇 마리가 따로따로 남아 있는 날이 있습니다. 각각 요리로 만들기엔 양이 애매하고, 그렇다고 버리기엔 아깝고. 저도 처음엔 그냥 다 한 팬에 던져 넣었습니다.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그 실패 덕분에 잡탕밥 하나 제대로 만드는 법을 몸으로 익혔습니다.

볶음 순서가 맛을 결정한다
일반적으로 볶음 요리는 재료를 한꺼번에 넣고 센 불에서 빠르게 볶으면 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오징어, 애호박, 파, 버섯을 동시에 팬에 넣었더니 오징어는 질겨지고, 채소는 아직 덜 익은 이상한 상태가 됐습니다. 볶음 요리에서 미장 플러스(Mise en Place), 즉 재료를 익는 시간에 따라 분리해 두고 순서대로 투입하는 준비 방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때 처음 실감했습니다. 미장 플러스란 조리를 시작하기 전에 모든 재료를 손질하고 투입 순서까지 미리 정리해 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가 두 번째 시도에서 바꾼 것은 간단했습니다. 대파와 양파를 먼저 2분 정도 충분히 볶아 단맛을 끌어낸 뒤, 애호박·표고버섯·홍고추를 넣고 강불(high heat)을 유지하며 빠르게 볶습니다. 강불 유지가 핵심인데, 채소에서 수분이 나오는 속도보다 빠르게 증발시켜야 볶음 특유의 고소한 마이야르 반응(Maillard reaction)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마이야르 반응이란 고온에서 단백질과 당이 반응해 갈색화되면서 구수한 풍미가 만들어지는 현상입니다.
그다음 불을 완전히 약불로 낮추고 다진 마늘과 고춧가루를 넣습니다. 마늘은 고온에서 금방 타버립니다. 저도 처음엔 강불 상태에서 마늘을 넣었다가 쓴맛이 올라오는 경험을 했습니다. 약불로 낮춘 뒤에 마늘을 넣어야 향만 살아납니다. 이 순서 하나가 맛의 완성도를 꽤 크게 바꿉니다.
볶음 순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대파·양파·청양고추를 식용유 두 스푼에 2분 볶기
- 애호박·표고버섯·홍고추 추가 후 강불 유지, 진간장 두 스푼 투입
- 약불로 낮춘 뒤 다진 마늘 한 스푼·고춧가루 한 스푼 넣기
- 오징어·새우·문어 추가 후 미림 두 스푼으로 비린내 제거
- 중불로 올려 1분 볶은 뒤 굴 소스 한 스푼 투입
전분물이 볶음과 덮밥을 가른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전분물을 넣기 전과 후가 이렇게 다를 줄 몰랐습니다. 넣기 전엔 그냥 채소 해산물 볶음이었는데, 전분물을 부은 순간 소스가 재료에 착 달라붙으면서 윤기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덮밥과 볶음을 가르는 경계선이었습니다.
여기서 전분물이란 감자 전분을 물에 풀어 만든 농후화 용액(thickening agent)을 의미합니다. 농후화 용액은 가열되면 전분 입자가 팽창하면서 액체의 점도를 높이는데, 이 과정을 호화(Gelatinization)라고 합니다. 호화란 전분이 물과 열을 만나 반투명한 겔 상태로 변하는 현상으로, 소스에 걸쭉한 질감과 광택을 부여합니다. 이 원리 덕분에 소스가 묽게 흘러내리지 않고 재료 표면에 코팅되듯 감기는 것입니다.
다만 전분물 양은 처음 만드는 분들이 헤매기 쉬운 부분입니다. 레시피에 '반 컵으로 시작해서 한 컵을 넣었다'는 식의 설명만 있으면 처음 만드는 사람은 기준이 없습니다. 제 경험상 재료 양에 따라 물 양은 달라질 수밖에 없고, 완성 기준을 시각적으로 아는 게 더 중요합니다. 팬을 기울였을 때 소스가 천천히 흐르면서 재료 표면에 코팅막처럼 남아 있는 상태가 적당한 농도입니다. 너무 묽으면 밥 위에 올렸을 때 물이 빠져나오고, 너무 되직하면 뭉침이 생깁니다.
굴 소스도 한 스푼 추가하는데, 굴 소스는 굴 추출물에 설탕과 소금이 더해진 발효 조미료로 감칠맛(우마미, Umami)을 단번에 끌어올립니다. 우마미란 단맛·짠맛·신맛·쓴맛과 함께 인간이 느끼는 다섯 번째 기본 맛으로, 글루탐산염이 수용체와 결합해 발생하는 풍미입니다. 간장만 넣었을 때보다 굴 소스를 함께 쓰면 맛의 깊이가 확연히 달라집니다.
한국식품연구원에 따르면 우마미 성분인 글루탐산은 발효 과정에서 농도가 높아지며, 이것이 발효 조미료가 요리의 맛을 단순 소금보다 복합적으로 끌어올리는 이유라고 합니다(출처: 한국식품연구원).
해산물 손질이 식감을 바꾼다
일반적으로 오징어는 그냥 썰어 넣으면 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저도 처음엔 그랬습니다. 그런데 칼집 유무에 따른 식감 차이가 생각보다 컸습니다. 칼집을 대각선으로 교차해서 넣으면 열이 가해졌을 때 오징어가 말리면서 표면이 오돌오돌해집니다. 이 오돌오돌한 질감이 소스를 더 많이 붙잡아서 한 입에 씹히는 맛이 살아납니다. 그냥 썰어 넣은 오징어는 납작하게 익어서 식감이 단조롭습니다.
칼집 낼 때 힘을 너무 주면 끊겨버립니다. 칼을 세우지 않고 눕혀서 잘잘하게 당기듯 긋는 게 맞습니다. 오징어를 반으로 펼쳐 겹치지 않게 놓고, 대각선 방향으로 먼저 칼집을 낸 뒤 반대 방향으로 교차해서 한 번 더 넣으면 됩니다.
해산물 비린내 제거에는 미림(味醂)을 씁니다. 미림이란 찹쌀과 소주를 발효해 만든 일본식 조미 청주로, 알코올이 가열 중에 휘발되면서 비린내 원인 물질인 트리메틸아민(trimethylamine)을 함께 날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트리메틸아민이란 해산물 특유의 비린내를 유발하는 휘발성 아민 화합물입니다. 두 스푼 정도면 충분하고, 넣은 뒤 바로 휘리릭 섞어서 알코올을 빨리 날려야 합니다.
재료 대체 범위에 대해서도 짚고 싶습니다. 냉장고 파먹기 콘셉트라면 어디까지 바꿀 수 있는지 기준이 있어야 실용적입니다. 제 경험상 해산물 계열은 낙지, 홍합, 바지락으로 바꿔도 맛의 방향이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반면 닭고기나 돼지고기로 대체하면 미림 비린내 제거 단계는 생략해도 되지만, 불 조절과 익히는 시간이 달라집니다. 해산물 없이 채소만으로도 가능한데, 이 경우엔 굴 소스 양을 조금 늘리고 표고버섯을 넉넉히 쓰면 감칠맛을 보완할 수 있습니다.
농촌진흥청 농식품 올바른 정보에 따르면 표고버섯에는 구아닐산(guanylic acid)이 풍부하며, 이는 글루탐산과 시너지를 일으켜 감칠맛을 배가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출처: 농촌진흥청). 해산물 없이도 표고버섯을 충분히 쓰면 맛이 밍밍해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잡탕밥은 화려한 요리가 아닙니다. 냉장고 한구석에 남은 재료들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어떻게 보면 가장 솔직한 음식입니다. 볶는 순서, 전분물 농도, 오징어 칼집 이 세 가지만 제대로 잡아도 처음 만드는 사람도 충분히 그럴싸한 결과물을 낼 수 있습니다. 냉장고에 애매하게 남은 재료가 있는 날, 한번 시도해 보시길 권합니다. 반찬 없이 한 그릇으로 충분합니다.